Posted on 2025. 06. 04.
대형참사 막은 ‘5호선의 기적’, 준비된 시스템과 신속한 대응 빛났다
지난 5월 31일 오전 8시 43분경 서울 지하철 5호선 여의나루역에서 마포역으로 향하던 열차 안에서 방화로 인한 화재가 발생해 420여 명의 승객이 지하 터널로 긴급 대피하는 아찔한 사고가 벌어졌다. 미리 준비한 시너로 추정되는 유리병을 들고 탄 60대 남성이 바닥에 ‘인화 물질’을 붓고 불을 붙이면서 검은 연기가 퍼져 나갔고, 승객들은 극도의 혼란과 공포에 빠졌다.
지하철 방화는 승객 밀집도가 높고 대피가 어려운 특성상 자칫 대형 인명피해 참사로 이어질 뻔했던 아찔한 순간이었으나 23명이 연기 흡입과 골절 등으로 병원에 이송한 데 그치고 심각한 중상을 입은 승객이나 사망자는 없어 천만다행이다.
하지만 일반 시민을 상대로 한 테러나 다름없는 ‘묻지 마 범죄’로 우리 사회의 도심 속 일반 시민들의 평범한 일상이 얼마나 쉽게 위험에 노출될 수 있는지를 극명히 보여줬다.
지하철 내부에 인화 물질을 뿌리고 불을 지른 범행 수법이 22년 전인 2003년 2월 18일 9시 53분 대구 지하철 1호선 중앙로역에 정차한 1079호 열차의 1호 객차에서 방화범 김대한이 객실 바닥에 모자와 양말 등을 놓고 휘발유를 뿌린 뒤 라이터로 불을 붙여 사망 192명, 부상 151명 등 모두 343명의 인명피해와 전동차 12량이 전소하고 중앙로역의 주요시설이 소실된 ‘대구 지하철 방화 참사’의 악몽을 떠올리기 충분하고도 남음이 있는 아찔하고 긴박한 순간이었다.
‘대구 지하철 방화 참사’ 당시 신변을 비관한 방화범이 객차 안에 휘발유를 뿌린 다음 불을 붙인 것처럼 이번 방화범도 이혼 소송 결과에 대한 불만으로 범행을 저질렀다고 한다.
하지만 이번에는 3억 3,000만 원의 재산 피해와 함께 23명의 승객이 경상을 입기는 했지만, 사망이나 중상은 한 명도 없었이 120명 정도가 현장에서 응급처치를 받았을 뿐이라고 한다.
기관사와 시민들이 침착하게 대응하고 관계 당국의 예방·대응 시스템이 정상적으로 가동된 것이 “5호선의 기적”을 일군 원동력이 됐다는 분석이 나온다.
불은 이날 오전 8시 43분쯤 총 8량인 열차 중간 지점에서 발생했다. 열차가 여의나루역을 출발해 마포역을 향해 달리던 중이었다. 승객들은 객차 안에 연기가 차오르자, 기관사가 있는 방향으로 몰려가 “불이야”라고 외치며 운전실 문을 두드렸는데 응답은 없었다고 한다.
지하철 출입문도 개방되지 않아 승객들이 의자 하단의 비상 개폐 장치로 문을 열고 탈출해 선로를 통해 걸어서 터널을 따라 마포역으로, 일부는 한강 아래를 지나는 하저터널을 따라 여의나루역으로 대피했다고 한다.
기관사가 응답하지 못한 것은 그 시간 승객들과 불을 끄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서울교통공사가 운영하는 5~8호선은 기관사 한 명만 탑승하는 ‘1인 승무제’로 운행되는 탓이다.
하지만 승객들의 성숙한 안전의식이 일군 침착한 대응과 28년 차 베테랑 기관사의 기민한 판단과 대피 유도 등이 빛나고 눈부셨다. 객차 내 ‘비상전화’로 화재 신고를 받은 기관사는 즉시 벽면에 비치된 소화기를 꺼내 승객들과 함께 화재 진압에 나섰다. 소방관들이 신속히 도착했을 때는 이미 추가 진화 작업이 필요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소방은 브리핑을 통해 “기관사와 승객의 자체 진화로 소방대원들이 진화 작업을 하지 않아도 될 정도였고 소방관들이 진입한 당시 상당수 승객이 대피한 상태였다”라고 설명했다. 또 “객차가 대부분 불연재로 돼 있어 쓰레기만 일부 불에 탔다”라고 했다.
놀란 승객들은 ‘비상 개폐 장치’를 이용해 열차 문을 연 뒤 노약자를 챙기며 질서정연하게 선로를 따라 대피했다. 그 아수라장 속에서도 노인과 어린이들이 먼저 탈출할 수 있도록 배려하는 성숙한 시민의식을 보여준 것이다.
수백 명이 컴컴한 터널을 빠져나왔는데도 그 과정에서 다친 사람이 없었던 이유다. ‘5호선의 기적’이라고 부를 만한 가치는 여기에 있었다.
‘대구 지하철 방화 참사’ 당시의 기관사는 화재 사실을 관제실에 알리지 않는 바람에 후속 열차가 상황을 모르는 채 진입해 인명피해를 키웠다.
승객들도 객실 안 소화기를 사용하지 못하고 우왕좌왕(右往左往)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이번 사고 때는 승객들이 비상 전화로 기관사에게 상황을 알린 뒤 객실 의자 하단에 있는 비상 개폐 장치로 열차 문을 열고 대피했다.
기관사는 안전수칙에 따라 바로 관제실에 알리고 두 차례 안내 방송을 한 후 곧바로 승객들과 함께 소화기로 화재를 진압했다. 서울교통공사 영등포승무사업소는 한 달 전쯤 이번 사고와 비슷한 상황에 대비한 소방훈련 및 인명 대피 훈련을 한 것으로도 알려졌다.
‘대구 지하철 방화 참사’ 이후 전국 지하철 열차의 바닥재, 의자 등 내장재를 불에 타기 쉬운 우레탄폼, 폴리우레탄 등 가연성 소재에서 불에 타지 않는 스테인리스 등 불연성·난연성 소재로 교체한 것도 피해를 줄이는 데 역할을 했다.
대구 지하철 방화 당시에는 가연성 열차 내장재가 불쏘시개 역할을 하면서 걷잡을 수 없이 불길이 번졌던 것과는 달리 이번에는 열차 일부만 소실되고 그을음 피해만 발생하는 정도에 그쳤다.
다른 재해·재난에 대한 대비도 다르지 않다. 미리 철저하게 준비하고 배운 대로 침착하게 대처한다는 평범한 원칙을 실천으로 옮기면 또 다른 기적을 만들어 낼 수 있음을 다시 한번 증명한 셈이다.
하지만 아직도 개선해야 할 문제점도 일부 노정(露呈)됐다. 용의자는 인화 물질이 든 유리병을 들고 아무런 제지 없이 열차에 탑승했다. 이처럼 명백한 위험물질 소지가 사전에 포착되지 않은 점은 지하철 보안 체계의 근본적인 취약성을 드러냈다.
일본 등 일부 국가에서 고위험 물품 반입 감지 장치나 탑승 전 보안 검색을 제한적으로 도입해 효과를 거두고 있는 만큼 타산지석(他山之石)으로 삼아 우리도 현실적인 수준의 선별적 보안 검색 체계 조기 도입을 진지하게 고민할 시점이다.
5호선 열차에는 객실 내 보안카메라가 설치돼 있었지만, 해당 영상은 운행 중 관제센터에 실시간 전송되지 않았다고 한다. 화재나 범죄 등 긴급상황이 발생하더라도 역무실, 관제센터에서는 객실 내부 상황을 즉각 확인할 수 없는 구조인 셈이다.
현행 시스템상 열차 내 보안카메라 화면은 기관사만이 운전실 내에서 확인할 수 있어, 차량 운행에 집중하면서 보안카메라까지 적극적이며 지속적으로 살핀다는 건 쉽지 않아 보인다. 사고 당시 대응은 일정 부분 개인의 판단과 용기에 의존했다.
열차 내 연기 감지 센서와 감시 장치, 자동 경보 방송 등 시스템 대응 체계가 얼마나 유기적으로 작동하고 있는지를 더 면밀하고 더 촘촘하게 다시 한번 재점검해야만 한다. ‘1인 승무제’로 운행하는 것 또한 한계가 있는 만큼 인원보강을 진지하게 고민해 볼 일이다.
특히 역무원과 기관사뿐 아니라 일반 시민들도 위기 상황에서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익힐 수 있는 시민 안전교육도 병행돼야만 한다.
무엇보다 사회에 극단적 불만을 품거나 정신건강·개인사에 문제를 안고 있는 사람들이 저지르는 ‘묻지 마 범죄’에 대한 경각심과 대책 마련도 시급하다. 이들 중 일부는 복지 사각지대에 놓인 고위험군으로, 사건이 발생한 뒤에야 실체가 드러날 때가 많다.
2023년‘대구 지하철 방화 참사’의 방화범 김대한이 2008년 화재로 소실돼 국민에게 큰 충격을 안겼던 국보 1호 숭례문 방화 사건의 방화범 채종기도 경기 고양시 일산에 소유했던 땅이 도로 건설을 위한 부지로 수용됐지만, 토지 보상액이 기대에 못 미치자 불만을 품고 방화했다. 커질 수 있는 사고를 사전 예방하기 위해서는 정신건강 관리, 위기 개입 시스템, 지방자치단체·복지 당국·경찰·소방 간 정보 공유 체계 강화 같은 정책적 노력이 특히 필요하다.
일찍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Napoleon Bonapart)’는 “우리가 어느 날 마주친 재난은 우리가 소홀히 보낸 지난 시간의 보복이다.”라고 말했다. 독일의 사회학자 ‘율리히 백(Ulrich Beck)’은 “현대사회는 위험사회(Risk Society)로 위험은 단순한 재앙이 아닌 예견된 잠재적 위험으로 급속한 과학기술 발전, 산업화 등에 주로 기인한다.”라고 경고했다.
‘벤자민 플랭클린(Benjamin Franklin)’은 “준비에 실패하는 것은 실패를 준비하는 것이다(By failing to prepare, you are preparing to fail)”라고 설파했다. 예방은 사후 대응보다 적은 비용으로 높은 효과를 거둔다.
거안사위(居安思危)와 초윤장산(礎潤張傘)의 지혜 그리고 유비무환(有備無患)과 상두주무(桑土綢繆)의 혜안으로 대형참사를 미리미리 막아야만 한다. 지하철은 매일 수백만 명의 시민이 이용하는 도시의 핵심 교통수단이다. 이번 방화 사건이 한 개인의 돌발적 일과성 범행으로 치부되지 않고 반면교사(反面敎師)로, 공공 교통수단과 도시 기반시설 전반의 안전성을 촘촘하게 재점검하는 계기가 돼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