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on 2025. 05. 21.


어르신의 기회가 담긴 국밥 한 그릇

▲이승로 성북구청장

“집에만 있으면 허리도 마음도 굽었는데, 이젠 다시 펴진다.”

봄을 기다리는 겨울의 막바지인 지난 2월, 성북구 장위전통시장 앞에 문을 연 ‘할매정(情)국밥집’에서 일하시는 황춘옥(73) 어르신의 밝은 목소리와 미소가 가게 문을 들어서는 손님을 먼저 반긴다.

‘할매정(情)국밥집’은 성북구와 성북시니어클럽이 서울시 공모사업으로 지역의 6~70대 어르신 여섯 명과 함께 전통시장 골목에 문을 연 작지만 특별한 식당이다. 15평 남짓의 작은 공간에 딱히 인테리어라 할 것 없이 테이블 6개가 전부인 이 공간은 단순한 ‘일자리’에 머무르지 않는다. ‘복지 수혜자’였던 어르신들이 다시 ‘일터의 주인’으로 돌아온 현장이다.

식당 일은 허리 펼 새 없이 종일 분주하나 마음은 다시 펴진다는 황 어르신의 짧은 말에는 많은 것이 담겨있다. 어르신의 일자리는 단지 생계를 위한 수단이 아니다. 몸을 움직이고, 공동체 안에서 사람을 만나고, 자신이 지역사회 안에서 여전히 쓰임 있는 존재임을 느낄 때, 비로소 다시 삶의 의지에 대한 활력을 얻는다. 어르신에게 ‘일’은 곧 자존이다.

성북구의 65세 이상은 전체 인구 대비 19.9%로 초고령사회 진입을 눈앞에 두고 있다. 대한민국은 지난 2018년 고령사회 거쳐 이미 초고령사회로 진입하였으나 여전히 대부분의 정책은 어르신을 ‘돌봐야 할 수혜적 존재’로 본다. 삶의 경험도, 일할 의지도 충분한 사회 구성원을 보호와 지원의 대상으로만 다루는 건 반쪽짜리 복지다.

“일만 있으면 난 지금도 나가서 하지.” “집에만 있으려니 하루가 너무 길어.” 현장마다 몇 번씩 듣는 어르신의 말씀은 항상 구청장으로써 마음 한편에 묵직한 책임감으로 남아 있고, 그 몇 마디의 진심이 행정을 움직이게 만든다.

어르신 일자리정책은 더 따뜻하고, 그들의 마음과 더 가까운 곳에서 현실적으로 실행되어야 한다. 그러기에 세심한 행정의 손이 닿을 수 있는 삶의 현장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어르신의 경험과 생활 기술을 살리는 일자리 내용과 지역 안에서 주민과 함께 지속 가능한 형태로, 단절된 일상과 관계를 다시 잇는 사회적 연결망의 역할이 되는 일자리로 설계되어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복지’가 아닌 ‘기회’가 된다.

노년의 새로운 활력의 기회가 되는 일자리를 위해서는 중앙정부가 갖고 있는 어르신 일자리 사업의 설계 권한을 지방정부로 이양할 필요가 있다. 지방정부는 지역의 여건과 주민의 목소리를 가장 가까이에서 듣고, 그에 맞는 일자리를 만들어낼 수 있는 곳이다. 사업 유형과 참여 조건을 유연하게 설계하고, 사업기관을 직접 선정하고 운영할 수 있어야 한다.

또한 단순한 인건비 지원을 넘어 교육, 공간, 홍보까지 통합 운영이 가능하도록 예산도 총액 지원 방식으로 바뀌어야 한다. 지방정부가 필요한 예산 항목을 자율적으로 편성하고 집행할 수 있도록 일자리 정책 예산 구조를 유연하게 풀어낼 필요가 있다. 현재처럼 항목별로 지정된 목적에만 쓰도록 제한할 경우, 실제 현장의 다양한 요구에 신속하게 대응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인건비 중심의 구조를 넘어, 참여 어르신 교육, 작업 공간 마련, 주민 홍보 등 일자리의 질을 높이는 데 필요한 요소들에 재정을 탄력적으로 운용할 수 있어야 한다. 어르신 일자리 정책은 중앙이 정한 틀을 따르게 하는 것이 아니라, 지역이 중심이 되어 설계하고 실천할 수 있도록 해야 더 오래가고, 더 깊이 닿는다. 그 전환의 시점이 지금이다.

‘할매정(情)국밥집’은 어르신이 ‘돌봄의 대상’이 아닌 ‘함께 살아가는 이웃’으로 남아 지역사회 구성원으로의 역할을 유도하는 작은 전환의 시작점이자, 지방정부가 일자리 정책의 능숙한 조타수가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행정의 사례이다.

예산보다 중요한 것은 의지이고, 매뉴얼 보다 필요한 것은 사람에 대한 이해다. 국밥 한 그릇에서 시작된 노년의 봄날이, 더 많은 마을로 퍼져가길 바라며 성북구는 앞으로도 지방정부의 행정이 주민의 삶의 온도를 따뜻하게 바꾸는 일에 집중하려 한다.

국밥집 벽에는 작은 안내문이 있다. “본 매장은 어르신들의 (중략)...입니다. 서비스 과정에서 미숙한 점이 있을 수도 있지만, 따듯한 마음으로 이해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어르신 일자리는 우리가 그들에게 베푸는 시해가 아니라, 우리가 배워야 할 인내와 삶의 깊이가 그분들 안에 있음을 깨닫게 한다. 할매정(情) 국밥 한 그릇의 따뜻함이 허기보다 마음을 먼저 데운다.

▲이승로 성북구청장(오른쪽에서 두 번째)이 첫 월급을 탄 ‘할매정(情)국밥집’ 참여 어르신들을 축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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