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on 2021. 10. 14.


‘지붕 없는 박물관’ 성북동! 다시 보니 더 아름다워
문학가 한용운, 전형필, 이태준 생가를 둘러보고, 선잠박물관, 옛돌박물관 등


▲성북동 전경


(시사프리신문=김영국 기자)         성북구(구청장 이승로)에서는 ‘지붕 없는 박물관’이라고 불리는 성북동을 둘러 볼 수 있는 버스투어를 도입해 서울시민과 주민들께 홍보에 나서고 있다.


성북동 투어 버스는 한성대 입구역 분수마루에서 출발해 약 3시간 정도 역사문화를 공유하며 돌아보는 코스로 짜여 있다. 가족과 함께 ‘지붕 없는 박물관’ 성북동을 찾을 계획이라면 버스를 이용해 보는 것도 추천할 만하다. 1천 원만 내면 역사가 살아 있는 성북동을 제대로 보고 느낄 수 있다. 


성북동은 흔히들 생각하는 그런 여행 관광지가 아니다. 역사가 살아 있고, 성북동을 돌아보면 잠들어 있던 역사의식을 일깨워 주는 곳이기도 하다. 조선시대 여인들의 고단했던 삶의 숨결을 느낄 수 있고, 독립을 위해 외치던 민족 열사들의 의기가 느껴지는 곳이고, 민족의 정기를 지키고자 했던 시와 소설 그리고 그림과 한옥이 우리의 시선을 잡아 가둔다. 힘들게 살아내야만 했던 발자취가 고스란히 보존돼 있다.        

 
성북은 조선시대 성의 북쪽에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일제 강점기 시절, 4대문 안에 인구가 늘어나자 인구 분산을 위해 동소문 밖으로 주거단지를 넓히는 도시계획을 구상하게 된다. 그러면서 의식 있는 사람 많고, 인심을 나누는 삶의 공간으로 변모하게 된다.


사람이 살기 좋은 환경은 무엇보다도 교통의 편리함이 우선되어야 한다. 전차와 버스길이 놓이고, 운행을 시작하면서 성북은 살기 좋은 주거 단지로 인식되게 된다. 성북은 광화문이나 종로까지 20분 내에 도착이 가능하기 때문에 접근성이 뛰어난 지리적 이점을 가지고 있다. 그러다 보니 예술인들이나 문인들이 거주하기 안성맞춤인 곳으로 알려지기 시작하면서 모여들기 시작했다.


인왕산과 북악산이 연결되는 아름다운 산세와 중심지와 가까운 지리적 연건으로 인해 의식 있는 예술인들이 모여 살며 교류의 장을 만들어 나가기 시작했다. 일제 강점기 시절에는 4대문 안보다는 치안이 허술해 감시망에서 조금은 자유스러웠다는 점도 독립 운동가들에게 매력적인 공유 공간으로 자리잡은 이유가 되기도 했다.


그럼 살기 좋은 우리 동네 성북동을 둘러보자. 성북동은 실제로 한양도성의 북쪽과 동쪽 성곽 지역에 속한 지역들이라 지명 역시 성곽의 북쪽을 뜻하는 성북과 동쪽을 뜻하는 성동으로 지어졌다. 달동네, 근대 한옥, 중산층 주택, 부촌 등등 20세기 옛날 풍경과 고층 아파트 같은 현대의 첨단적인 도시 풍경이 교차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또한 예전부터 한양도성과 가까웠던 관계로 만해 한용운 선생이 돌아가실 때까지 살던 심우장, 우리 문화재의 일본 약탈을 막고 보존하고자 전 재산을 털어 세운 간송미술관, 조선시대 선잠제를 지내던 선잠단지, 민간이 운영하는 우리옛돌박물관 등 다양한 문화재와 볼거리, 먹거리가 우리를 반긴다.



[한용운생가 심우장]


성북동 골목에 있는 만해 한용운 선생의 유택이다. 1933년에 벽산 스님과 조선일보 사장 방응모 등에 의해 지어졌다. 심우장은 한옥 중에서도 특이하게 남향(南向)이 아닌 북향(北向)으로 된 한옥이다. 남향이 아닌 이유는 돌건물(조선총독부)이 보인다는 이유로 산비탈에 있는 북향 터를 사저로 잡아 짓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이 곳에서 한용운 선생은 일제의 만행에 맞서기 위해서 노력했다.


한때 최남선이 찾아왔을 때도 "내가 아는 최남선은 이미 죽어서 장례까지 치러 버렸소"라며 만나지도 않았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그리고 일제 형사가 찾아왔을 때는 호통을 치며 왜놈한테 돈 받을 일 없으니 나가라며 보내 버렸다고 한다. 그러나 한용운 선생은 해방 1년을 남겨 놓고 1944년에 이 심우장에서 돌아가셨다.


심우장은 북향이라는 특성 때문에 남향에 있던 한옥과는 달리 햇볕이 들지도 않았던 음침한 곳이었고, 여름이면 남향에 비해서 매우 습하고 더웠으며 겨울이면 남향에 비해서 매우 추운 편이라 사람이 살기에 매우 나쁘다는 평판을 받아왔다. 그러나 한용운 선생은 죽을 때까지 이 집을 고집하면서 왜놈과 싸우겠다고 다짐하면서 살았다.


겨울철에는 혹한, 여름철이면 혹서에 시달렸지만 한용운은 이곳에서 태연하게 지냈다. 보통사람이 살아가기에는 정말로 살기가 불편한 곳이라는 평이 있다. 그리고 1944년에 한용운 선생이 이 곳에서 운명하면서 백범 김구의 경교장과 함께 영원한 위인의 안식처로 남게 되었다.

[선잠단지와 박물관]


성북동에 위치한 선잠단지는 조선시대 역대 왕비가 누에를 길러 명주를 생산하기 위하여 잠신에게 제사를 지내던 곳이다. 지금은 예전의 모습을 완벽하게 찾아볼 수 없어 조금은 아쉽다. 그러나 뜻있는 성북동 주민들이 선잠제를 복원하기 위해 노력했고, 2016년 도로로 유실된 일부를 제외하고 복원하여 매년 3월경 주민들 손으로 선잠제를 지내고 있는 곳이다.


양잠의 기원은 상고시대부터 시작되었다. 선잠단을 쌓은 것은 고려시대부터 시작된 것으로 전해진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왕비가 직접 누에를 치는 중요한 소임 가운데 하나가 되기도 했다. 특히 세종은 양잠을 크게 장려하였다. 이 제단은 조선시대 1471년(성종 2년)에 처음 쌓고 양쪽에  단을 쌓고 그 앞쪽 끝에 뽕나무를 심었다. 이 뽕나무에서 뽕잎을 따서 궁궐 내 잠실에서 키우는 누에에게 먹였다. 그러나 지금은 약 10여 그루의 뽕나무만 심어져 있다.


양잠의 역사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박물관도 눈에 띈다. 구립박물관으로 2017년 개관하였다. 지상 1층의 제1전시실은 “터를 찾다”라는 주제로 성북구의 선잠제향과 선잠단 복원 작업을 소개하는 다양한 자료를 전시하는 공간이다. 지상 2층의 제2전시실에서는 “예를 다하다”라는 주제 아래 선잠제의 내용과 친잠의례의 역사를 담은 모형과 유물을 관람할 수 있다. 지상 3층 제3전시실은 “풍요를 바라다”라는 주제로 전통 옷을 관람할 수 있는 자수 관련 소장품 전시를 한다. 지금은 금수(금실로 만든 비단 옷)를 놓아 만든 비단 옷을 전시하고 있다.



[우리 옛돌 박물관]


우리옛돌박물관은 2015년 11월 11일 서울 성북동에 개관한 국내 최초의 석조유물 전문 박물관이다.


박물관은 전체 부지면적 5,500평과 건물 연면적 1,000평 규모의 공간에 3층 건물 5개 전시실(환수유물관, 동자관, 벅수관, 자수관, 기획전시관), 야외 전시관(돌의 정원)으로 구성돼 있다.


환수유물관은 환수유물 70점 중, 문인석 47점을 전시한다. 문인석은 장군석, 석수(石獸)와 함께 능묘를 지키기 위해 세워진 석상으로 우리나라 능묘 제도와 조각 양식의 변화 양상을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다. 문인석이 손에 쥐고 있는 물건을 \'홀(笏)\'이라고 한다. \'홀\'은 신하가 임금을 알현할 때 두 손에 쥐던 패를 말한다.


동자관은 동자석으로 구성돼 있다. 동자석은 16세기~18세기 중반까지 서울과 경기지역을 중심으로 왕실가족과 사대부 묘역에 조성된 석물이다. 쌍상투를 틀고 천의를 입고 지물을 들고 있는 어린아이의 모습으로 공손히 시립하여 엄숙한 묘역에 활력을 불어넣는 존재이다. 동자는 도교(道敎)에서는 신선의 곁에서 시중을 들고, 불교(佛敎)에서는 부처님이나 보살을 곁에서 모시며, 유교(儒敎)에서는 무덤 주인의 심부름을 하는 아이이다.


벅수관에 전시된 벅수는 경상도와 전라도에서 장승을 부르는 명칭으로 순우리말이다. 옛 사람들은 마을 입구나 길가에 사람의 얼굴을 한 벅수가 서 있으면, 전염병을 옮기는 역신이나 잡귀들이 겁을 먹고 마을로 들어오지 못 한다고 믿었다. 또 재화를 막고 복을 가져다주는 신비스러운 힘이 있다고 여겨 마을의 벅수에게 갖가지 크고 작은 소원을 정성스레 빌었다.
자수관에는 280여 점의 전통자수가 전시돼 있다. 자수는 일상에서 사용하는 옷과 장신구 등의 생활용품 및 의례용품에 수복강녕을 기원하는 길상문양을 넣은 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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