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on 2015. 10. 22.


안중근과 동양평화론


서울북부보훈지청 보상과 권욱선

  10월 26일은 안중근 의사가 1909년 하얼빈 역에서 일제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 처단한 날이다. 
  안중근 의사는 사형선고를 받고 뤼순감옥에서 항소권을 포기하는 대신 동양평화론을 쓰고자 했다. 변호사들이 의례적인 공소를 권유했다. 그러나 안중근은 “내가 불공평한 재판에서 사형을 언도받고도 공소권을 포기한 것은 죄를 인정해서라고 생각지 마시고, 나는 구차에게 목숨을 부지하고 싶지 않을 뿐이오. 상급법관 역시 일본인이니 그 결과가 뻔한 것 아니겠소” 라며 공소권유를 물리쳤다.
  그 대신 자신이 오랫동안 구상해온 동양평화론을 집필하여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게 된 의거의 목적이 이루어지기를 바랬다. 동양의 평화가 이루어지기를 기원했다.
  안중근은 법적으로 보장된 공소권까지 포기하면서 동양평화론을 쓰고자 했고 일제도 이를 수용했었다. 그렇지만 일제는 이 약속마저 어겼다. 그가 남긴 글의 내용이 두려웠던 것이다. 안중근은 동양평화론의 체제를 서문 ? 전감 ? 현상 ? 복선 ? 문답 등 5단계로 잡았다. 그러나 서문과 전감만 완성되고 뒷 부분은 형이 집행됨으로써 완성되지 못하고 말았다.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하얼빈 역에서 처단한 이유는 동양평화의 당위성을 알리기 위한 것이고 동양평화라는 도덕 세계를 구현하기 위해 일제의 대외침략 정책을 수정하도록 하는데 그 목적을 두었던 것이다.
  1909년 안중근 의거 당시의 대외 정세가 현재와 다른 역사적 한계가 있지만 무력으로 동양을 지배하려는 일제의 수법은 한계에 봉착한다는 것을 기술하면서 동양평화론의 구체적인 실천방안을 관동도독부 고등법원장에게 제시했고 이는 우리가 표면적으로만 알고 있는 안중근의 진면목을 잘 알지 못한다고 생각되어진다.
  안중근은 전쟁을 종식시키기 위해 이토를 처단한 것이고 동양의 평화를 추구하기 위해 한 ?중 ?일 세 나라가 서로 외교적인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것을 설명하면서, 여순을 중국에 돌려주고 중립화하여 동양평화회의를 조직하고, 공동의 은행을 섭립하고, 3국의 청년들로 하여금 2개국 이상의 어학을 배우게 하여 우방 또는 형제의 관념을 높이고 한?중?일 세나라의 황제가 로마 교황청을 방문하여 협력을 맹세하고 왕관을 받는다는 내용이 “동양평화론”의 주요 내용이다.
  이는 물론 안중근 의사가 천주교 신자였고 그 당시 정세를 감안하여 주장한 것이기는 하지만 21세기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도 알려주는 시사점이 결코 가볍지 않다고 생각한다.
  전쟁은 파멸로 가는 길일 뿐 결코 그 해답을 주지 않고, 서로 공존하는 외교적인 노력이 중요하다는 것을 안중근은 알고 있었으니 지금도 군사적인 대치상태의 긴장을 늦추지 않고 있는 동북아시아의 정세에 비추어 볼 때 동양평화론의 정신은 안중근이 의거를 일으킨 100여년이 지난 오늘도 그 정신이 더욱 연구되어야 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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