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on 2015. 09. 23.
미아리고개 넘어 미래로 통일로
서울북부보훈지청 보훈과장 이덕진
미아리 고개는 사연이 참 많은 곳이다. 조선시대 이전에는 야인들이 이 고개를 넘어 한양으로 침입해와 다시 미아리 고개를 넘어 사람들을 잡아갔다. 그리고 일제강점기에는 공동묘지가 조성되어 명절마다 성묘 행렬이 줄을 이었고 저마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은 이야기들이 전해 내려왔다.
이런 것들도 과거의 이야기로 요즘 사람들에게 미아리 고개에 대해 물어보면 반야월 선생이 작곡한 ‘단장의 미아리 고개’ 또는 미아리고개를 따라 늘어선 점성촌을 떠올릴 것이다. 하지만 그중에도 ‘단장의 미아리고개’라는 곡이 어떤 배경으로 탄생하게 되었는지를 알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6.25 전쟁당시. 미아리고개는 사실상 수도 서울 방어를 위한 마지막 방어선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6.25 전쟁당시 북한의 압도적인 화력에 국군이 ‘속수무책’으로 후퇴했다고 알고 있지만 그것은 오해다. 2차대전 당시 활약하며 맹위를 떨친 탱크는 그 존재만으로도 무시무시한 전력이었다. 게다가 탱크를 상대로 전투를 벌여본 군인은 유럽에나 있을까 아시아에는 전무한 실정이었다. 이런 탱크를 밀고 내려오는 북한군이 서울을 점령하기 전까지 무려 3일이나 지연했다는 사실은 당시 우리 군의 사정을 감안해 볼 때 오히려 기적에 가까운 것이었다. 그때 김순대위같은 호국영웅들이 탱크를 향해 육탄돌격을 감행하는 희생을 치러가며 싸우지 않았다면 서울은 더 일찍 함락되었을지도 모르고 이는 한강방어전 구축 및 미군 참전 결정에 영향을 끼쳐 6.25전쟁을 전혀 다른 방향으로 이끌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결국 1950년 6월 28일 서울은 함락되었고 피난가지 못한 사람들은 모진 고초를 당했다. 다행이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한 뒤 국군과 연합군은 서울을 되찾았지만 후퇴하는 북한군은 당시 지식층과 사회지도층을 대거 납북하기에 이른다.
‘단장의 미아리 고개’를 작곡한 반야월 선생은 이런 전쟁통에서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막내딸을 영양실조로 잃었다고 한다. 그리고 급한대로 죽은 아이의 시신을 미아리 고개에 뭍고 피난을 떠났다가 돌아왔으나 끝내 아이의 시신을 찾지 못했다고 한다. 이러한 자신의 아픔과 미아리 고개를 넘어 가족들을 납북당한 사람들의 심정은 ‘단장의 미아리 고개’에 오롯히 담겼고 이 노래는 오랜 시간이 지나도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올해는 광복 70년, 분단 70년이 되는 해이다. 하지만 미아리 전투는 아직도 패전이라는 멍애를 쓰고 그 정당한 가치와 위상이 재평가되지 않고 있으며 당시 가족들과 이별한 6.25전쟁 납북인사 가족들은 아직도 아픔과 그리움속에 헤어진 가족과 만날 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
때문에 서울북부보훈지청과 성북구재향군인회는 오는 9월 17일과 18일 양일간 성북구청 바람마당에서 미아리전투의 가치와 의미를 알리고 6.25납북가족들의 아픔을 공유하기 위한 “2015 미아리고개를 넘어 미래로 통일로”행사를 개최한다. 17일 15시 개최되는 기념식을 비롯해 여러 부대 행사로 꾸며지는 이번 행사에 참여한 시민들은 미아리 고개가 왜 미래와 통일의 상징이 되어야 하는지, 그리고 그를 위한 우리의 역할은 무엇인지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될 것이다. 아울러 이번 행사를 통해 미아리 고개가 더 이상 역사의 질곡과 아픔을 상징하는 아이콘이 아닌 그곳에서 우리 민족의 미래와 통일이 시작되는 평화의 상징으로 거듭나기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