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on 2014. 01. 22.
김상옥의사의 서울시가전 승리 91주년을 맞이하여
서울북부보훈지청 보훈과 김옥진
1923년 3월 15일 동아일보가 호외로 보도한 내용이다. 요즘처럼 인터넷이 발달하지 않아 뉴스의 전파가 느리던 시절. 호외는 가장 효과적인 뉴스 전달의 수단이었다. 즉 호외로 발행할 만큼 이 뉴스는 가치가 높았다는 뜻이다.
이 사건에서 지칭한 범인은 당시 일제의 심장부라 불리던 종로경찰서에 폭탄 투척을 감행하여 일경 10여명에게 중상을 입히는 성과를 올린 뒤에도 신출귀몰한 총솜씨로 다무라 형사부장을 사살하고 수명의 경관에게 중상을 입힌뒤 사라진다.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한 것도 모자라 출동한 일제 경관을 사살한 사건은 일제에게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하지만 일제의 폭압에 신음하던 국민들에게는 형언할 수 없는 통쾌함을 주었고 소문은 일제가 이 사건에 보도 금지령을 내렸음에도 빠르게 퍼져나가 당시 사람들 중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일제는 5일 뒤 고문을 통해 알아낸 범인의 은신처에 1000여명의 병력을 투입, 대대적인 공격을 감행한다. 하지만 그 범인은 이를 상대로 권총 두 자루만을 가지고 3시간동안 혈투를 벌이며 구리다 경부를 사살하는 등 일경 16명에게 중상을 입히고 마지막 남은 탄환 1발로 자결, 장렬한 최후를 맞는다.
당시 범인의 총격이 멎었음에도 일경은 두려움에 나아가지 못한 채 범인의 어머니를 위협해 범인의 생사를 확인하게 하는 치욕적인 궁여지책을 썼다고 한다.
이렇듯 일제를 두려움에 떨게 한 인물. 각시탈과 같은 드라마에나 나올 법한 이 인물의 이름은 한지 김상옥(韓志 金相玉)의사다. 1890년 서울 동대문 어의동(현재 효제동)에서 태어난 김상옥 의사는 가난했던 환경에도 불구하고 야학으로 학구열을 불태우는 한편 청년에 되어서는 ‘영덕철물점’을 설립하여 부를 축적, 국산장려운동에 적극 동참함은 물론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한다. 또한 일제 총독 등 고관 암살계획을 진행하다 발각되자 상해로 망명, 항일무장독립운동 단체인 ‘의열단’에 입단하여 적극적인 무력 항일활동과 독립운동 자금 조달에 매진한다.
이후 다시 비밀리에 입국한 김상옥의사는 당시 그 누구도 상상할 수 없었던 종로경찰서 폭파라는 의거를 통해 일제를 두려움에 떨게 함은 물론 하루 하루 핍박속에서 연명하던 우리 국민들에게도 크나큰 자긍심과 긍지를 심어주게 된다. 또한 일제의 폭압속에 비슷한 처지에 있던 중국 등 아시아 국가들을 자극함은 물론 이후 우리나라의 대일본 무력투쟁에 도화선 역할을 하게 된다.
정부에서도 김상옥의사를 기념하고자 서울시가전 승리 90주년의 의미를 재조명하는 학술회의를 작년 개최하였으며 김상옥의사를 널리 알리기 위해 전기발간사업과 기록영화(다큐멘터리) 제작에 착수, 현재 마무리 단계에 와 있다. 또한 김의사가 태어나고 활약했던 효제동 일대를 민족혼의 중심지로 조성하기 위해 동대문역사에 김의사와 ‘영덕철물점’을 모티브로 한 조형물 설치 작업을 진행중이다.
1월 22일은 김상옥의사가 대한민국의 서릿발 같은 분노를 담아 서울시가전을 승리로 이끈지 91주년이 되는 날이다. ‘동대문 홍길동 김상옥의사가 일제 1000명을 상대로 혼자 싸우다 돌아가신데 분노해 독립운동에 투신했다’라는 애국지사가 있을 정도로 김상옥의사가 우리 민족에게 던진 메시지는 분명하다. 위안부 문제는 물론 노골적인 군국주의 노선을 걷고 있는 일본을 향해 우리 대한민국은 김상옥 의사의 후예이며 그 어떤 잘못된 판단도 좌시하지 않을 것이라는 강력한 의지를 보여줘야 할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