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on 2013. 10. 30.
안중근의사 기념관을 가보신 적 있나요?
서울북부보훈지청 이지희
몇해 전 참새처럼 재잘대는 초등학생들과 함께 남산에 있는 안중근 의사 기념관을 방문한 적이 있다. 한참 왁자지껄하며 떠들던 아이들은 안중근 기념관에 가까워오자 조금은 숙연한 분위기가 되었고, 기념관에서 나오신 학예사님은 아이들 앞에 서셨다.
그때 학예사님의 말씀 “얘들아, 너희 런닝맨 아니?”
기념관의 웅장함과 엄숙함에 잠시 숙연했던 아이들은 깡충깡충 뛰며 “네~~~”하고 대답하였다.
“오늘은 선생님과 친구들이 조를 나누어서 런닝맨 게임을 할건데, 대신 약속이 있어. 전시관 내부에서는 절대 뛰지 않고, 조용히 미션을 수행해야 해. 알겠지?”
아이들은 일순간 학예사님의 말씀에 집중하며 배부한 학습지를 바라보았다.
전시관에 들어서서 다함께 참배를 하고, 조별로 학습지를 들고 아이들은 전시관 곳곳을 자세히 관찰하며 안중근의사와 관련된 문제집인 학습지의 빈칸을 채워 나갔다. 약속된 시간이 경과된 후 아이들은 다함께 강당에 모여 안중근의사의 동영상을 관람하고 수행해온 학습지의 정답을 맞추어가며 조별 미션 수행 우수조를 선정하였다.
아직은 어린 아이들이 안중근 기념관에서 조금은 지루해 하지 않을까 하는 염려는 기우에 불과했다. 안중근의사 기념관에서 마련된 교육프로그램을 통해 아이들은 안중근 의사의 일대기를 정확히 인식했고, 나라사랑을 위해 몸을 바친 안중근 의사의 모습을 보며 숙연해지며 감사하는 마음을 갖는 모습은 참 인상깊었다.
안중근의사는 1879년9월2일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나 1894년 결혼하여 2남1녀를 둔 남편이자 아버지였다. 나라의 독립을 위해 사랑하는 가족을 두고 타국에서 생활하며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역에서 이토히로부미를 저격하였다.
안중근의사는 “나의 목적은 한국의 독립과 동양 평화의 유지에 있었고, 이토 히로부미를 살해하기에 이른것도 개인적인 원한에 의한 것이 아니라 동양의 평화를 위한 것으로 아직 목적을 달성했다고 할 수 없기 때문에 이토를 죽여도 자살할 생각 따위는 없었다”고 하였다.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후 바로 러시아군인에게 붙잡힌 뒤에도 당당히 “코레아 우라!코레아 우라! 코레아 우라!(대한제국 만세)”를 외쳤다.1909년 11월 1일 뤼순 감옥으로 옮겨지고 각종 심문과 재판을 거쳐, 1910년 2월 14일 열린 여섯 번째 공판에서 재판장이 사형선고를 내렸다. 그때 안중근은 힘차고 떳떳한 목소리로 외쳤다. “일본에는 사형보다 더 무거운 형벌은 없는가?”
1910년 3월 26일 오전 10시 안중근은 뤼순 감옥의 교수대로 올라갔다. 사형을 당하기 며칠 전 동생들에게 유언하였다. “내가 죽으면 내 뼈를 하얼빈공원에 묻어 두었다가 조국이 주권을 찾거든 그때 조국으로 옮겨다오 나는 천국에 가서도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하여 힘쓸 것이다. 너희는 돌아가서 동포들이 국민의 의무를 다하며 마음을 모으고 힘을 합하여 큰 뜻을 이루도록 전해 다오. 대한 독립의 소리가 하늘나라에 들려오면 나는 거기에서 춤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
그 분의 마지막 유언은 아직까지 안중근 의사의 유해를 발굴하지 못해 안타까움이 남을 뿐이지만, 말씀 한마디 한마디는 현재의 우리에게 큰 감동으로 남아있다.
사랑하는 가족을 두고 30대의 젊은 나이에 오직 나라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친 그 당당함과 용기는 가슴 뭉클한 감동으로 다가온다. 그 분들의 희생이 있었기에 현재의 대한민국이 존재하며, 현재의 내가 존재한다. 안중근의사 의거 103주년을 맞는 10월26일을 보내며 한번쯤 안중근의사 기념관을 방문해 그분의 정신과 업적을 되새겨보며 감사하는 마음을 갖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