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on 2010. 10. 28.


 

도서명: 히로히토 평전, 근대 일본의 형성
저   자: 허버트 빅스
역   자: 오현숙
출판사: 삼인
출간일: 2010-09-20
가   격: 35,000원

 

 

책소개

 

누가 히로히토에게 면죄부를 주는가

히로히토(裕仁, 1901-1989)는 우리에게 낯설지 않은 이름이다. 일반인의 앎 속에 그는 124대 일본 천황이자, 1926년부터 집권해 제2차 세계대전을 체험했으며,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투하된 후, 무조건항복 선언을 한 인물로 남아 있다. 또 강경한 우익 성향의 군부가 주도했던 태평양전쟁에서 허수아비 역할을 했고, 종전 후에는 상징적 지위에 머물면서 심지어 평화를 설파했던 것으로까지 기억된다. 히로히토라는 이름은, 태평양전쟁과 일제 강점기가 거론될 때 총독부, 일본 우익, 군부, 가미카제 특공대 같은 명칭들이 나온 뒤 한참 후에나 따라오곤 했다. 일본 본토와 우방인 미국은 물론이고, 일본과 늘 어딘가 불편한 관계였던 한국과 아시아 여러 국가들에서조차도 히로히토가 일본제국의 잔악한 현대사와 태평양전쟁을 주도했다는 제대로 된 비난이나 논의는 나온 적이 없다. 곧 히로히토에게는 늘 일종의 면죄부가 주어졌던 셈이다.
신간 『히로히토 평전, 근대 일본의 형성』은 이러한 세간의 인식을 뒤엎는 책이다. 물경 900페이지가 넘는 이 책에서 저자이자 역사학자인 허버트 빅스는, 일왕 히로히토가 태어날 때부터 전제군주로 길러졌고, 태평양전쟁에서도 누구보다 주도적인 역할을 했으며, 따라서 전쟁 책임 문제에서 결코 면죄부를 받을 입장이 아님을 적나라하게 밝혔다. 저자에 따르면 히로히토는 한국과 중국 등 아시아 국가들에 대한 침략과 공세, 학살은 물론이고, 미국에 맞선 전쟁에서는 전진과 후퇴와 같은 소소한 전술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사항을 장악하고 통제한 사실상의 전쟁 지도자였다.
종전 후 일본 우익과 미국은 암묵적 공조 속에 히로히토에게 유약하고 유명무실한 천황이라는 가면을 씌워 태평양전쟁에서 히로히토라는 이름을 없애려 했지만, 그는 냉혹하고 잔인한 군주였을 뿐만 아니라, 기소조차도 한 번 받지 않고 아흔 살이 가깝도록 천수를 누렸다는 것이 저자의 냉정한 진단이다. 『히로히토 평전, 근대 일본의 형성』은 학문적 엄밀성과 집요함을 가지고, 바로 그 히로히토의 탄생에서 죽음에 이르기까지 행적을, 일본 제국주의의 형성과 변화에 이르는 과정 속에서 면밀하게 조명하고 추적했다.


일본제국 잔혹사와 히로히토

 

근대 일본은 메이지 천황이 쇼군 휘하 막부의 손에 있던 권력을 장악했을 때부터 시작됐다. 그전까지 천황이 하는 일은 지극히 상징적인 것으로, 신도의 축문을 읊으며 제사를 올리고, 시[和歌]를 지으며 예능을 발현하는 것이지 군사나 정치가 아니었다. 그러나 메이지 천황 집권기에 만들어진 메이지 헌법은 정치와 군사를 장악한 명실상부한 전제군주로서 천황의 지위를 보장했다. 20세기에 접어들어 제국주의로 발전한 일본의 잔혹한 역사는 그렇게 그 기반을 닦은 것이다. 그러나 제도만으로는 모든 것을 담보할 수 없었던 것일까. 메이지 천황의 아들 요시히토(嘉仁, 1912-1926년)는 병약한 인물이었다. 천황에게 주어진 사상 초유의 막강한 권력과 권위에도 불구하고 주변에는 천황에 대한 회의의 눈길이 끊이지 않았다. 의회정치 실현을 추구하는 정치가, 언론인, 지식인 들이 등장했고, 미국 문화와 개인주의가 부상하는 ‘다이쇼 데모크라시’의 시대로 접어든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요시히토의 아들이자 메이지의 손자인 히로히토는 강한 천황의 부활이라는 일본 우익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엄격한 군대식 교육으로 메이지 천황의 본을 받도록 훈육되었으며, 당시 이미 제국주의 국가로 급부상하던 일본의 공격적 행보에 익숙해지도록 의식화되었다. 천황으로 태어나 천황으로 길러졌으며, 자기 자신을 전제군주이자 신격을 가진 존재로 인식하도록 교육된

것이다.

저자에 따르면 요시히토의 사망 직후에 히로히토는 다소 어설픈 모습을 보였다. 목소리는 여자 같았고, 풍채는 왜소했으며, 대단한 영민함이나 정치적 감각을 보이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잇단 해외 순방과 천황 주변 세력의 끊임없는 관

심, 천황제 이데올로기를 등에 업고 아시아 패권 재패를 노리던 우익 군부의 영향 속에서 점차 지도자로서 면모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각료들과의 회의에서 중립적인 입장을 취하는 척하면서도 언제나 손을 들어주는 쪽은 강경한 발언을 하는 군부 쪽이었고, 각종 정책과 군사 전술에도 점점 깊숙하게 관여하기 시작했다. 특히 태평양전쟁이 막바지에 달할 무렵에는 군사 지도자로서 자신의 위치를 분명히 했다.
예를 들어 히로히토는 중국 현지 관동군이 상부를 명령조차 따르지 않고 만주에서 공격적인 준동을 하는 것을 유야무야 눈 감아 주었고, 결국 만주사변을 용인했다. 당시 사료와 증언에 따르면 히로히토는 충분히 사태의 확산을 막고 일본 제국의

향배를 온건화할 수 있었는데도 사실상 잔인한 패권적 행보를 승인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히로히토는 1930년대에 이르러 전황이 일본에 불리해지자 독가스 등 화학무기 사용을 재가하기 했으며, 중국 몇몇 도시에 대한 무자비한 대인 공격을 허락하기까지 했다. 1940년대 들어서는 우익 세력의 지지를 얻고 있던 기도 고이치(木戶幸一)를 내대신으로 임명했으며, 중일전쟁 확대 문제로 사임했던 고노에 후미마로(近衛文麿)를 다시 수상으로 임명하면서, 동시에 육군 강경파 도조 히데키(東條英機)를 육군대신으로 삼는 것을 용인했다. 아울러 중국과 한국 이외의 아시아 국가들에 대한 침략을 진두지휘했으며, 개전에 관한 국제법조차 어기면서 하

와이 진주만 공습을 주도했다.강경 우익으로 정계를 좌지우지하고 개편해가던 히로히토는 전쟁 막바지에 이르

러 패색이 짙어졌을 때는, 우익 세력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집요하고 끈질기게 일본의 항전을 주장했다. 그가 전쟁 종결 의사를 비친 것은 미군의 소이탄 폭격으로 60개 이상의 도시가 초토화되었을 무렵이다.

히로히토는 오히려 중신들 편에 기울어, 전쟁 종결은 “다시 한 번 전과를 올린 후가 아니면 좀처럼 이야기하기 어렵다”고 했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고노에는 “그렇게 말씀하실 시기가 과연 오겠습니까. 지금 해야만 합니다. 반년, 1년 뒤에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렇지만 히로히토는 자신의 견해에 집착했다. 우리 신민은 초인적인 노력과 희생을 감내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석유 자원을 잃고 매일 공중 폭격을 받는다 해도 일본은 승리할 수 있다. 일본이 마지막 결전에서 승리를 거두면 강화 협상의 전망이 밝아진다. 이것이 천황의 견해였다. - 3장 중

 

평화애호자라는 가면 그리고 전쟁 책임론

 

일본의 무조건항복으로 결국 전쟁은 끝났으나, 냉전 체제에서 일본을 방위 세력으로 만들려는 맥아더 주도의 연합국군최고사령관총사령부(General Headquarters, GHQ)와 천황제의 존속으로 자신들의 안녕을 바랐던 일본 집권 세력의 담합에 의해, 히로히토는 면죄부를 받았다. 천황의 지위를 유지하는 것은 물론이고, 전범 재판에서 기소되지 않는 동시에 다른 전범들의 증언에서 그의 이름이 거론되는 일이 없도록 사전 담합과 여론 조작도 행해졌다.
히로히토 대신 전쟁 책임을 뒤집어쓴 도조 히데키는 법정에서, “평화를 바라는 천황의 의사에 반하여 기도 고이치(木戶幸一)가 어떤 행동을 취하거나 무언가 진언한 사례를 기억하느냐”는 질문에 저도 모르게 “그런 사례는 물론 없습니다. 내가 아는 한은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일본의 신민이 폐하의 의사에 반하여 이러쿵저러쿵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라고 말해놓고는 이튿날 바로 발언을 뒤집었다. 이런 과정을 거쳐서, 전제군주로 길러진 히로히토가 최초로 ‘인간 선언’을

한 ‘상징 천황’이 되었다.
‘입헌군주’를 자처했던 히로히토의 통치는 메이지 헌법의 ‘무답책(無答責: 군주가 정치적으로나 법률적으로나 어떠한 책임도 지지 않는 것)’으로 보호되었는데, 그는 신하에게도 백성에게도 책임감이 없었다. 그가 책임져야 할 것은 오로지 ‘황조황종(皇祖皇宗)’에 대한 도리뿐이었다. 황조는 태양여신인 아마테라스오미카미에서 시작되어 진무(神武) 천황에 이르는 신화상의 선조를 뜻한다. 황종은 그 뒤를 대대로 이었다고 전해지는 역대 천황들을 의미한다. 1945년, 항복을 촉구한 포츠담 선언으로부터 8월 6일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떨어질 때까지, 히로히토는 포츠담 선언에 관해서는 아무런 말도 행동도 하지 않았지만, 7월 25일과 31일 두 번에 걸쳐 ‘3종 신기’를 어떻게든 보호해야 한다는 말은 했다. 패전을 앞두고 그가 걱정한 것은 신하도 백성도 아니고 ‘국체’를 상징하는 ‘3종 신(神器, 검과 곱은옥, 청동거울)’의 안위였으며, 그가 끝까지 지키고자 한 ‘국체(國體, national polity)’는 나라의 제도나 정치 체제가 아니라 바로 황조황종의 후손인 자기 자신이었다. 천황이 침략전쟁으로 자기 나라 인민과 다른 나라 사람들의 삶을 파탄에 이르게 한 책임을 지지 않도록 하면서, 정치 지배층은 ‘전쟁에 대한 책임’을 온 국민이 나눠 짊어져야 할 ‘패전 책임’으로 바꿔놓았다. 일본 국민은 도리어 천황 앞에서 신하로서 패배의 책임을 져야 했다. 그리고 미군 점령자들은 한 줌의 ‘군벌’에게 가장 큰 책임을 뒤집어씌우고 천황과 인민은 일방적으로 기만당한 희생자라는 생각을 주입했다. 천황이 전쟁 책임을 지지 않으니 일본 국민도 책임을 질 필요가 없었다.
이런 가운데 천황은 종전 후 기회가 있을 때마다 평화를 설파하고 다녔고, 전쟁 책임 문제가 불거질 때마다 자신에게는 책임이 없으며, 오히려 종전의 공은 자신에게 있다고 강조했다. 미국 방문 때는 디즈니랜드에서 미키마우스와 함께 웃는 모습을 연출하며 인자한 평화애호자로서 이미지를 굳혔다. 이토록 합당하지 않은 가면과 함께, 그나마 종전 직후 일본 진보 세력에 의해 표면화되는 듯했던 전쟁 책임론은 언제부터인가 사라져버렸다.

히로시마 원폭 투하에 대한 질문에 그는 “원자폭탄이 투하된 것에 대해서는 유감으로 생각합니다만, 히로시마 시민들에게는 안된 일이지만 전쟁 중이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고 생각합니다”고 말했다. 자신의 통치하에 일어났던 일을 무심하게 방관하는 듯한 그의 태도는 많은 일본인들에게 지나친 것으로 여겨졌다. 그의 “어쩔 수 없다”는 발언은 히로시마를 비극으로 몰고 간 과정에서 그가 했던 역할을 완전히 부인하는 것으로, 특히 역사학자들을 분개하게 했다. - 4장 중학문적 엄정함과 정의로운 집요함으로 써낸 역작이 책은 30년에 걸쳐 일본 근·현대사에 대한 저술을 하고, 미·일 양국에서 일본사를 강의해왔으며 2001년까지 일본 히토쓰바시 대학교 대학원에서 교수까지 역임한 허버트 빅스 빙햄튼 대학교 교수가 10년에 넘는 기간 동안 집필한 역작이다.

2001년도 퓰리처(논픽션 부문)상을 수상한 이 책 서문에서 저자는 밝히길, 집필 과정에서 수많은 일본 연구자들과 관련자들로부터 도움을 받았으며, 일본인 장인으로부터는 히로히토 치세 초기에 대한 증언까지 확보했다. 일본에서도 『昭和天皇』이라는 제목으로 출간이 된 이 책은 일본과 미국 심지어 한국 정부까지 공개적으로 문제 삼지 않는 히로히토의 전쟁 책임론이라는 문제를 전격적으로 다룬다는 점에서 큰 화제를 모았다. 특히 이 책은 단순히 이데올로기적 또는 정치적 입장에서 히로히토의 과거사 문제를 고발하는 것이 아니라, 일본 제국주의의 형성 과정에서 히로히토가 차지한 위치, 영향, 궤적을 치밀하고 정교한 학문적 시선으로 논했다는 점에서 큰 특징이 있다. 이는 헤아릴 수 없는 희생자를 낳은 태평양전쟁의 잔인한 진실과 책임 소재를 추적하려 했던 저자의 집요함과균형감각을 잃지 않았던 학문적 엄정함 덕분에 가능한 것이었다.

측근 한 사람은 독백록의 서문에, 천황이 “대동아전쟁의 직․간접적 원인, 경과와 종전에 이르기까지의 사정”에 대해 약술했다고 기록했는데, 이도 사실과 다르다. 히로히토의 진술에는 천황 자신과 궁정관료들이 차기 총리대신을 선임하고, 독자

적인 국정 방침을 지시함으로써, 1920년대 중후반기에 발전한 정당정치 제도를 동요시켰던 사실도 들어 있지 않다. 중국에서 전쟁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도, 확전을 직접 주도한 일도, 일본군 육상부대와 항공부대의 움직임에 대해서도 말하지

않았다. 자신의 인생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경험이나 사건, 그로 인해 형성된 가치 기준, 행동을 규정하고 인격을 형성한 사상 등, 히로히토가 입을 다문 채 침묵으로 일관한 것은 이외에도 많다. 타인을 희생하면서까지 자신의 지위를 결사적으로 지키려 했던 점에서 그는 근대의 군주 가운데 가장 솔직하지 못했던 인물 축에 들었다. - 서장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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